삼척 1박2일: 꿈같은 삼포로 겨울

여행 유튜버 해보겠다고 뽀짝거린 지 얼마 안되어
첫 국내여행 콘텐츠 만들어보겠다고 편집하다가
완성본을 날려버렸다.
환멸이 몰아친다. 역시 적성에 맞지 않아 천형인가 싶다.

쇼츠 한두개 올려보다가 결국 예쁜 겨울 여행 일기를 남겨보고 싶은 생각에 뒤늦게 키보드를 토닥거려본다.

시작은 회사 휴양시설 당첨이었다. 쏠비치 삼척 1박! 👏🏻👏🏻👏🏻

전국(에 가까운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1월 15일,
동도 트기 전에 집을 나서 기차를 탔다.
한숨이라도 더 자려고 행신역-서울역 구간 KTX타는 사치 부려봤다.

서울역을 떠난 기차가 동쪽으로 달리는 동안 비와 눈이 경계 없이 내렸다.
날이 밝은 뒤에도 날이 밝다는 표현이 무색색하게 사방이 희거나 잿빛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소설(정대건의 '급류')에 한껏 몰두해 가슴 저릿하게 마지막장 덮을 즈음, 한참 설국을 달리던 기차가 마침내 바다를 끼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KTX이음은 상하행 모두 A석을 예매해야 한다고.
미리 찾아보길 잘했다.
파도가 차창을 넘어 들어올 것처럼 바다를 가깝게 볼 수 있었다.
흐린 날이라 그런지 더 성난 것처럼 보이는 바다가와 그 생명력이 벅차게 느껴졌다.

동해역에서 내리자 마자 택시 타고 방탄소년단 버터 앨범자켓 찍었던 맹방 해수욕장 들렀다가 눈도 아닌 비오는 동해바다가 얼마나 서글픈 노릇인지 뚜렷하게 체감하고 말았다.
분명 그 색이 아닌데 🤷🏻‍♀️ 이 빛깔이 아닌데 과연 같은 장소가 맞는지 어리둥절...

터덜터덜 어영부영 '오복예향'이라는 막국수집 오픈런 해서 브런치(?) 사먹고 나니 일단 체크인해야겠다는 생각 뿐.

같이 여행하기로 한 사촌동생한테
호기롭게 언니만 믿으라며 큰소리쳐 놨지만
특별히 계획 하고 떠나온 여행이 아니었기에 어쩐지 벙벙해진 일정.

다행히 이 꼬맹이도 엄청나게 알찬 여행을 기대하고 온 건 아닌것 같았다. (게으른 자식 고마워 찡긋)

쏠비치가 얼리체크인이라고 돈 더 받지 않고 룸 준비되는대로 입실시켜줬다.
마음에 쏙 드는 융통성 있는 처사.

산토리니 컨셉에 잡아먹혀버린 쏠비치 컨셉에 장단 좀 맞춰 주며 장내를 거닐다가
컨셉의 정점에 있는 카페 마마티라에서 뷰 값이 8할일 커피도 사먹고, 수다 실컷 떨었다.

마냥 애기인 줄 알았던 사촌동생이 제법 어른다운 고민들을 하는 걸 보니 우리 같이 늙어가는 구나 싶어 마음 찡하기도 하고, 기분이 오묘했다. 내 머릿속엔 여전히 빼액빼액 우는 희고 동글고 조그만 아가인데.

코코넛 라떼 정말 맛있긴 했음. 구천원이었나 아무튼 맛없으면 화났을 것이다

답 없는 수다 매듭집고
방으로 돌아와서 히터 빵빵하게 틀어둔 뒤 널직한 거실에 널부러져 넷플릭스 보고 유튜브 봤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집에서 하던 작태를 왜 멀리 예쁜 곳까지 와서 하고 있는건지에 대한 의문이 살짝 들었지만. 😅

대게 역시 사먹으러 나가기 귀찮아서 배달의민족으로 시켜 먹었다.
라면 끓여 마무리 했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취사가 안돼 아쉬웠다. 컵라면을 미리 사올걸 하는 후회가 일었지만 아무튼 포식.
첫날은 온종일 이동 외에 한 것 없이 오션뷰 히키코모리 짓만 하다가 일찍 잠이 들었다. (행복)

동트기 전 일어나 구름 뒤에서 뜨는 해 보며 조식 먹는 걸로 시작한 둘째날.
오늘은 맑으려는지 제법 구름이 걷히는데 그제서야 거실 밖 발코니 뷰가 제대로 보였다.
촛대바위와 설산이 예술이었다.

첫날 오후 널부러진 와중에 야심차게 삼척관광택시 예약한 점은 지금까지도 칭찬해주고 싶다.
관광객과 삼척시가 매칭그랜트? 방식으로 비용을 기사님께 지불하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돈을 내고 맘껏 돌아다닐 수 있는 프로그램.
대중교통이 영 좋지 않은 삼척에서 뚜벅이 여행객의 생존을 위한 필수템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네시간짜리로 예약을 하고

🚩 삼척쏠비치
➡️ 미인폭포/죽서루/나릿골감성마을/강원종합박물관/천은사
🚩 레일바이크 궁촌 정거장에서 종료

이렇게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는데(동선이란 건 생각도 안해보고), 기사님이 듣자 마자 각이 안나온다고 하셔서

🚩 삼척쏠비치 ➡️ 미인폭포 ➡️ 강원종합박물관 ➡️ 죽서루 ➡️ 🚩 레일바이크 궁촌 정거장
이렇게 다니기로 합의했다.

미인폭포 가는 길. 파란 하늘 아래 가지위 가득 쌓인 눈 마치 목화솜 더미 같았음

첫 목적지인 미인폭포는 차로 올라가는 길부터 내내 장관이더니 정말 온통 눈에 덮여있었다.

신이 나서 예쁘다 예쁘다 최고다 연발하며 실컷 사진을 찍긴 했는데 막상 눈 때문에 미인폭포로 진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주차돼있는 차들로 봐서는 내려간 분들이 있긴 있는듯 한데 바지도 신발도 방수 재질이 아닌데다가 장갑까지 안 가지고 나온 우리는 도무지 눈길을 뚫고 내리막을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너무너무 아쉬웠지만 돌아설 수밖에.
조난 당하거나 바지 다 젖어서 감기 걸리면 나만 손해니까 흑흑.

어쨌든 이만큼 반작이는 설경을 만끽했다는 것만으로 미인폭포 입구까지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다 제치고 이번 삼척 1박2일이 가치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포슬포슬 가지에서 눈 떨어지는 기척, 내 발 아래 뽀독거리는 소리, 이따금씩 뱉을 수밖에 없는 감탄사 외에는 사방이 고요한 하얀 천국.

삿포로 안부러운 풍경이었다. 삼포로라고 불러줄 테다.

그 다음 어딜 가야할지 애매해서 찾아간 게 강원종합박물관인데, 입장료 대비 약간 후회가 되는 곳이었다.
환선굴 등 동굴속 지형들을 본따 만들어둔 곳이 인스타그램에서 핫하길래 뭐 대단한게 있나 싶어 갔는데 그게 다였다.
애들은 가면 좋아할 듯!

오직 인스타그램만을 위한 박물관같았던 강원종합박물관 (다 안돌아봐서 그럴수도)

미인폭포 가는 길 다음으로 좋았던 건 이날씨에 괜찮으려나? 싶었던 레일바이크였다.

의외로 계속 몸을 움직여야 해서 추위가 가시는 듯한 착각이 있어 다행이었고 철길 옆으로 보이는 새파란 바다와 해송이 정말 아름다웠다. 동굴? 터널? 안 내리막 구간은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처럼 재미있었다.

맨 앞 자전거를 탔더라면 속도를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앞 차들이 속도를 내지 않아서 아쉬웠을 뿐이다.

궁촌-용화 구간으로 타고 나면, 용화에서는 다시 궁촌까지 셔틀버스가 데려다준다.
결과론적으로 방향 선택을 잘한 것 같다.
궁촌-용화 구간이 바다를 길게 보고 터널에 들어가는 루트고, 체감상 초반부 터널 밖에서 오르막이 좀 있는 대신에 터널 안과 후반부가 전부 내리막이라 지치지 않고 탈 수 있었다. 레일바이크 타고 난 뒤에는 시내버스 타볼까 시도하다가 배차간격 49분 앞에 무릎 꿇고 콜택시를 불렀다.
<헤어질 결심> 촬영지라는 부남해변과, 추암 촛대바위를 찍고 동해역까지 쭉 가는 코스로 기사님과 딜을 했다.

몹쓸 기억력 탓에 하루전날 복습을 스킵했더니 정확한 스팟은 가물거렸으나 이 바다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마지막 장면의 여운들이 고스란히 몰려오는 것 같았다.

어디에선가 아직도 해준이 목놓아 서래를 부르짖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이 작은 해변을 찾아낸 로케담당자에게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마지막 행선지는 동해시와 삼척시의 경계에 있는 추암 촛대바위.

애국가에서 동 트는 장면에 등장하는 그 바위다. 맑은날 동틀 무렵에 왔더라면 그 풍경을 진짜로 보는 것에 전율했을텐데 살짝 아쉬웠지만 해질녘은 또 해질녘대로 서쪽에서 쬐는 햇빛을 받은 바위와 바다가 파스텔빛으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곳은 언제든 아름답다.

새삼 우리나라에도 정말 아기자기 예쁜 곳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내년엔 운전을 시작할 생각인데, 그렇게되면 나 정말 주말에 수도권에 안 붙어 있겠구나 싶다.
그때 가면 뚜벅이 여행만의 고된 스릴과 좌충우돌이 그리워 질 수 있으니까 올해도 국내 여행 부지런히 다녀야지.

유튜브로 다 편집해놨던 것 싹 날리고 다시 주절 주절 적어보려니 대충 하게 됐지만
이정도 기억은 적어두고 싶었다.

1박2일 삼포로 겨울여행 복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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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o ergo sum

삼척 1박2일: 꿈같은 삼포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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