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감상보다 연대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이다혜 최세희 조영주 지음 / 민음사

영미권의 판례를 보면 '현재성의 원칙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정하면 안 된다, 장기적으로 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기준이 보입니다. 총기로 매일 위협을 당하던 아내가 남편이 잠깐 놓아 둔 총기를 집어 들고 남편을 쏠 때, 그 순간 남편이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내의 심리 상태는 여전히 총기로 머리를 위협당하고 있을 때의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 영미권 법의 판단입니다.

 

'급진적 범죄학'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범죄라는 것은 권력과 부를 지닌 지배 계층이 피지배 계층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에 불과하다고 보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지배층이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절도죄라는 식이죠.

 

니체가 '당신이 악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도 당신을 쳐다본다.'라고 했는데요, 이수정 박사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악의 심연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악의 심연에 들어가 보고자 하는 시도를 낭만화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가 보면 간접적이긴 해도 본인에게 심적 고통이 발생하게 됩니다. 저도 비슷하게 '이 범죄들을 도대체 어떻게 소화하고 생산적인 일로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사회에 알리기로 한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는 방향에 도움이 된다면 당장 이득은 안 되겠지만 그게 곧 저에게도 해소의 길이 됩니다. 

 

문화 상품은 만들어진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지금 만들어지는 많은 작품들 역시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는 지금과 다르게 해석될 것입니다. 훨씬 더 많이 나아져서 '어떻게 그때는 이런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지?' 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미래에는 성 규범이 크게 바뀌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결혼하지 않은 채 각자 사는 시대가 되어, <번지 점프를 하다>를 보면서 그때는 그래도 남녀가 저렇게 싸우기도 했구나 하고 향수를 갖게 될지도 모르지요. (웃음) 언제나 미래가 좋은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만연된 사회에 미래는 없습니다. 옆집 아이를 사고팔아도 우리집 일이 아니니까 우리 가족은 안전할까요? 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 용인되어서는 안 될 일들이 수사하기 어렵다, 접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방임되는 동안 사회는 썩어 문드러질 것입니다. 현재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고 어떻게든 규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만약 수사가 어렵다면 부분적으로 함정 수사라도 허용해야 합니다.
인권 침해의 위험이 있다지만, 누군가의 인권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족 안에서, 학교에서, 세상에서, 경전이나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과 영화를 통해 착실히 교육받았다면, 그 과정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성취를 거뒀다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 책을 골라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온갖 범죄 소설을 읽고 커 온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장르를 다른 눈으로 돌아보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자는 너무도 자주 첫 장면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시체였고, 남자의 범행 동기가 되는 흑막이었고, (누아르 영화에서는 "여자를 찾아라.(Cherchez la femme.)"라는 경구도 있다. 사건이 있으면 관련된 여자부터 찾아보라는 뜻이다.) 탐욕스러운 노파이거나 범행을 저지른 남자를 회개하게 하는 성녀였다. (이 두 여성이 모두 등장하는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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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몇 마디로, 찰나의 한 장면으로, 이야기 전체를 통해, 노골적으로 또 때론 은은하게. 모든 영화에는 세상의 어두운 무늬가 조금씩 깃들어있다.

그 무늬는 결코 지나치게 극적일 수가 없다. 기사 쓰기 위해 읽어야만 했던 수많은 아동학대, 가정폭력, 성범죄 판결문에는 영화보다 지독한 현실이 건조한 언어로 박제되어 있었다. 어떤 엄벌도 피해자의 영혼에 남은 비가역적인 상흔을 감히 치유할 수 없었다. 법은 오히려 상처입은 약자에게 더 자주 불충분했다.

이런 주제들을 끊임없이 파헤치던 때로부터 벌써 오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 책에 다루어진 어떤 지점들은 그 때 그 문제의식에서 몇발짝 나아가지 못한 걸로 보인다. 그만큼 더디고 힘든 싸움을 소수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거겠지.

영화로 드러나는 암담한 면면을 오늘을 사는 여성의 시각에서 발굴하고 해체하며 법을 고칠만큼 강력해야만 하는 연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연대를 믿으며 계속 이야기하는 오직 그 힘으로, 제도와 사회의 공백을 시나브로 메워나가며 어제보단 나은 내일을 희망할 수밖에.